안톤 체호프의 「내기」와 생명의 고귀함
19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단편에 「내기」란 작품(1888)이 있다. ‘사형제’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부유한 60대 은행가와 평범한 20대 변호사가 내기를 한다.
은행가가 말한다. “자유를 박탈당한 채 한평생 감옥에 있어야 한다면 차라리 한순간에 죽는 게 더 인간적이지 않은가?”
이에 변호사가 말한다. “아무리 중범죄인이라도 바로 죽이는 사형보다야 오래 살리는 종신형이 훨씬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요?”
논란이 길어지자 참다못한 은행가가 탁자를 꽝 치며 말했다. “만일 당신이 독방에 5년간 갇혀 있을 수 있다면 내가 200만 루블을 주겠소.”
이 말에 변호사도 “진심이시라면 나는 15년도 갇혀 있겠소.”라 했다. 그리하여, 15년의 자유와 200만 루블 간 내기가 시작됐다.
은행가는 정원 한편에 감옥방을 만들어 경비를 배치하고 변호사를 가뒀다. 감옥은 술, 담배, 책, 피아노, 편지 등이 가능했다. 작은 창문으로 필요한 물품도 공급됐다. 그러나 면회나 외출은 금지였다. 그렇게 15년을 참고 견디면 변호사는 큰돈을 벌게 된다. 은행가는 변호사가 얼마 못 가 포기할 것이라 믿었다.
난생처음 옥살이를 시작한 변호사는 처음에 고독과 무료함에 시달린다. 술, 담배는 피하고, 피아노와 소설책으로 위안 삼았다. 2년차가 되자 죄수는 고전을 읽기 시작한다. 5년째는 음악 소리가 나고 술도 마시기 시작했다. 그 뒤로 외국어, 철학, 역사를 공부하고 복음서와 신학서도 읽었다. 나중에는 화학, 의학, 철학도 섭렵했다. 마침내 약속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 은행가는 투자 실패로 재산을 거의 탕진해버린 상태였다. 갑자기 거액 내기가 부담스러워졌다. 이제 새날이 오면 200만 루블을 죄수에게 줘야 하는데, 이는 빚더미를 뜻했다. 그래서 죄수를 죽일 결심을 하고 경비원이 잘 때 몰래 감옥방에 들었다. 그런데 방안 책상위에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 내용은 이랬다.
“내일 열두 시에 나는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나는 몇 마디 하고 싶다. 나는 책 속에서 온갖 기적이나 호사를 다 누렸고 통찰력도 얻었다. 동시에 나는 세상의 모든 행복과 지혜를 경멸한다. 모든 게 시시하고 공허하다. 그대들은 분별을 잃고 잘못된 길을 걷는다. 그대들 삶의 방식을 경멸하기 위해 나는 한때 갈망했으나 이젠 하찮아진 200만 루블을 거부한다. 이 권리 포기를 위해 나는 약속 기한 5시간 전에 여기서 나갈 것이다.”
이를 읽은 은행가는 이 기인(奇人)의 머리에 조용히 입을 맞춘 뒤 눈물을 흘렸다. 평생 경험하지 못했던 자괴감과 자기혐오가 솟구쳤다. 사람 귀한 줄 아는 젊은이가 내기에서도 사실상 승리했지만 패배할 뻔한 자기마저 살려냈으니 젊은 변호사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였다.
안톤 체호프의 「내기」 Ⓒ교보문고
갈수록 사람 귀하게 여기기가 어려운 까닭
은행가의 사례에서도 잘 나타나듯, 많은 돈을 주무르는 사람은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오래지 않아 배신당한다. 돈벌이가 생각과 달리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마음대로 돈벌이가 잘 되더라도 대부분은 사람을 갈구거나 착취한 결과, 나아가 자연을 함부로 대하고 훼손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 경제란 ‘돈 놓고 돈 먹는’ 사회다. 자본을 투자해 더 많은 자본, 즉 초기 투자금에다 이윤까지 덧붙여 얻는 구조가 곧 자본주의다. 어떻게? 사람의 노동력을 구매한 뒤 노동하게 만들어서다. 이미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는 인간 노동이 상품 가치의 원천이라 말한 바 있다. 칼 마르크스는 그 위에다 잉여가치 개념을 보태어, 노동력이 자기 가치(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잉여가치)를 만들어내기에 이윤이 생긴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 사람의 노동력이 자연을 가공해 원료나 부품으로 만들고, 또 그 원료나 부품·기계를 잘 결합해 시장에 팔 상품을 만드는 ‘노동’을 하기에 잉여가치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를 일종의 거대 기계라 한다면, 사람(노동력)이건 자연(원료, 에너지 등)이건 그 기계를 위한 부속물 내지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 구조 자체가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중에는 사회적으로 높은 대접을 받는 자도 있다. 반면, 대다수는 먹고살기 빠듯할 정도로 아등바등 살아간다. 상층과 하층 사이에는 ‘갈비의 법칙’도 작동한다. 아래로는 ‘갈’구고, 위로는 잘 ‘비’벼야 조직에서 살아남고 승진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공동체는 해체되고 각자도생의 살벌한 경쟁만 남는다. 그 사이에 자연 생태계는 (현재 우리가 미세먼지, 자원고갈, 기후 위기, 각종 오염, 방사능 위험 등에서 보다시피)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경쟁을 내면화한 채 피라미드 질서의 높은 자리로 오르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이 ‘본의 아니게’ 만들어낸 결과다. 즉,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구조를,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바람에 마침내 ‘집단자살체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람 귀하게 여기는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2014년 4월, 250명의 수학여행 고교생을 포함한 304명의 승객이 진도 앞바다 차가운 물속에 갇혀 돌아오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이런저런 참사들이 있었고, 2022년 또 160명의 귀한 목숨들이 하늘나라로 떠났다. 따지고 보면, 매일의 노동 현장 역시 사회적 참사다. 하루에만도 수십 명, 수백 명이 다치고, 공식 통계만으로도 10명 내외가 죽어 돌아온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일하러 갔으나, 죽어서 퇴근하는 기막힌 현실이다. 그렇게 죽어가는 이가 1년에 수백 명이고, 다치는 이가 수만(!) 명이다.
그런 노동 현장에 노동력으로 ‘취업’하기 위해 해마다 수십만 명 학생들이 대학 입시 준비를 하고, 유치원이나 초등학생부터 중ㆍ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공부’ 잘하는 것만이 귀한 사람 대접받는 지름길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람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바로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길이다.
진정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면 마치 처음에 아가가 탄생했을 때처럼 사람 그 자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눈을 뜨고 귀와 입을 열고 몸을 뒤집고 기기 시작할 때, 모든 순간들이 기적 같다. 걷기 시작하고 말하기 시작하면 그 또한 기적이다. 골목이나 운동장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공놀이도 하고 책도 읽고 여행도 하고, 그렇게 커나가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무얼 할까?’라는 식의 꿈이 생기면 그 또한 기적이다. 그 꿈을 더 뜻깊게 실현하기 위해 사회적 의미까지 덧붙인다면 그것도 기적이다. 그런 ‘사회적 꿈’을 꾸도록 생각 깊은 어른들이 도와주면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꾸준히 실력을 쌓아 약 10년 뒤에는 ‘철학 있는 전문가’로 성장한다면 기적은 더 커진다. 그런 전문가들이 다방면에서 풍성하게 탄생, 마침내 ‘사회 헌신’을 하며 산다면 사회적 기적이 벌어질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철학 있는 전문가’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실력자다.
모든 아이들이 나름의 꿈을 꾸기 시작하고, 그 꿈에 걸맞은 실력을 쌓아 나가고, 또 그렇게 해서 철학 있는 전문가들이 많이 나올수록, 사람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더 빨리 구현된다. 반대로, 돈과 권력에 중독된 채 무엇이 중요한 가치인지 모르고 앞서 나온 은행가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사람 목숨은 파리 목숨처럼 하찮게 여겨질 것이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후자의 경향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돈과 권력을 움켜쥔 사람들을 보라. 과연 그들이 진정 내면적으로 행복한가? 과연 그들은 진정 이 사회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하는가? 그들의 화려한 성과나 업적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나 생활을 침해하지 않고도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나 자연의 생명력을 교묘히 좀먹는 바탕 위에서 억지로 만들어진 것인가?
중독 시스템과 중독 행위자
ⓒclipartkorea
따지고 보면, 이런 경우는 다른 사람들만 괴롭히는 게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마저 괴롭히면서 겉보기에만 화려한 업적을 내기 일쑤다. 그래서 외면은 성공하더라도 내면은 늘 불안하고 공허하며 초조하다. 이 불안감이나 공허감을 가리기 위해 (술이나 섹스, 마약이 아니라 할지라도) 또다시 명품 옷이나 가방, 비싼 자동차, 비싼 아파트와 고급 여행, 비싼 리조트와 골프장 같은 것으로 덧칠하려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해야 하고 더 많은 자연을 파괴해야 한다. 중독 시스템이다! 그 구성원들은 대다수 중독 행위자로 산다.
이런 면에서 정말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구조의 본질과 과정이 중독 시스템으로 돌아감을 정직하게 (두려움 없이) 대면해야 한다. (실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아니오.’라며 내치기 전에 ‘혹시 나도 중독 시스템 속의 톱니바퀴’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별로 길지 않은 인생, 돈과 권력의 달콤한 맛에 중독된 나머지 귀한 시간을 허비하다가 마침내 죽을병에 걸리거나 임종이 가까워질 때 비로소 큰 후회를 해봐야 늦다. 더 늦기 전에 너도나도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한다면, 지금이라도 사람 귀하게 여기는 사람, 사람 귀하게 여기는 사회(시스템)는 얼마든 가능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중독 시스템과 ‘헤어질 결심’을 할 용기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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