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우리 함께 일해 봅시다.”
파트너십과 관련한 글을 써달라는 말에 먼저 떠오른 것은 조금 엉뚱하게도 김원영 변호사의 <희망 대신 욕망> 앞머리에 인용되어 있는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의 말이었다. 왜일까. 아마도 파트너십이라는 탈을 쓰고 자행되고 있는 수많은 일들 때문이었을 거다.
일방적인 관계는 언제나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곤 한다. 많은 지자체에서 반복되는 봉사활동의 메커니즘은 기울어진 관계의 전형이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특히 생활문화 현장에서 이런 장면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경로당이나 복지관, 장애인 시설, 지역아동센터 등을 찾아가 공연을 하는 것이나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진 물품들을 기부하는 과정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공연하고, 물품을 기부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시설에 거주하거나 출입하는 이들에게 일상의 전환을 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큼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들이 파트너로 삼은 경로당과 복지관, 장애인 시설…. 아니, 노인이나 장애인, 저소득층 등을 대상화하고 시혜의 대상으로 고정화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봉사활동이 갖는 효과 자체를 부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트너십의 원칙을 확장해서 적용해 보자는 이야기다.
남들을 돕거나 공공의 일에 자신의 역량을 투입하면서 삶의 보람을 찾는 분들이 있다. 그 자체로 감사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사회적 존재감을 충전하고 자아의 효능감을 확인하는 사람들을 숱하게 만나보았다. 이게 왜 문제냐고 이야기할 분들도 있을 듯한데, 주는 사람-받는 대상의 관계를 설정해 놓고 받는 이의 자리를 한없이 왜소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너무 뚜렷하다. 우리의 해방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없이 저 고정화된 주고받음에 대한 믿음이 지속된다면 파트너십이란 말은 설 자리가 없다.
정보와 권한의 공유라는 원칙
파트너십을 제대로 꾸리기 위해서는 정보와 권한을 어떻게 나누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연애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상대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함께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무엇을 먹을지 어디로 갈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동등한 관계일 수 있을까. 상대방의 취향과 성향에 대해 묻지 않고 자기 맘대로 결정한 메뉴와 장소가 만족스러운 데이트를 끌어낼 수 있을까. 상대에게 결정할 권한을 주지 않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을 마련해 준다 해도 결국 독단과 독선으로 흐르기 쉽다.
전국적으로 법정 문화도시 사업을 추진하며 거버넌스와 관련한 논의와 실천들이 활발하다. 물론 여러 사례에서 행정이 면피용으로 만들어내 민간 영역을 동원하는 ‘무늬만 거버넌스’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정보와 권한을 나눌 생각은 않은 채 시민들을 자리 채우는 용도로만 취급하기 때문이다. 속초에서 문화도시 예비사업을 진행하며 시민들이 프로그램의 내용과 예산을 결정할 수 있게 자리를 열었더니, ‘이래도 되는 거냐’며 참여자들이 주저하며 망설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본격적인 파트너십의 경험이 많이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할까. 행정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결정하고 생색까지 내는 것이 오랫동안 축적되다 보니 자연스러운 일로까지 여겨지곤 하는 것이다. 사실, 행정은 공공의 전부가 아니다. 공공에 관한 모든 것을 행정에 고스란히 위탁해버리고 나면 시민은 그저 소비자와 구경꾼이 되고 만다.
분명한 것은 거버넌스가 행정의 실패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복잡한 세계의 문제들에 접근하기 위해 행정만의 자원과 역량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지점들을 민간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해결하려는 노력의 산물이 거버넌스라고 해야 한다. 여전히 행정기관이 갖는 권한이 시민들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권력자 행세를 하는 공무원이나 기관 담당자들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방식의 시민 거버넌스에 대한 모색은 이제껏 지역에서 보지 못했던 실험들을 끌어내는 중이다. 많은 도시가 참여자들이 사업의 내용을 결정하고 운영할 수 있는 리빙랩 스타일의 활동을 통해 시민들의 문화적 역량을 끌어올리는 일을 시도하고 있다. 공간과 관련한 파트너십도 활발하다. 춘천의 도시가 살롱, 포항의 삼세판, 부평의 부평별곳, 완주의 우리동네 문화공유공간 등은 공간을 매개로 민간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한편으로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정책사업의 특성상 단기간에 집중적인 예산이 투입되어 실행되고 있는 이 사업들은 아직까지 울퉁불퉁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문화도시를 통해 만들어진 경험들은 개별 도시를 넘어 지역의 협력과 파트너십 구축의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춘천 도시가 살롱 현장 모습 ⓒ 춘천문화재단
소통과 신뢰라는 원칙
파트너십에서 아주 중요한 매개고리는 소통과 신뢰다. 소통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가끔은 소통이라는 말이 너무 닳고 닳아 클리셰가 되어 버린 상황이 안타깝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과 신뢰가 파트너십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게임이론은 소통과 신뢰의 어떤 지점을 잘 드러내 준다.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가장 유명한 게임이론 중 하나는 ‘죄수의 딜레마’다. 범죄조직의 구성원 두 명이 체포되었다. 범죄자들은 각각 독방에 수감되어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경찰은 이들을 기소하기 위한 증거가 부족하다. 경찰은 이들에게 자백을 받아 범죄를 입증하려 한다. 경찰이 제시한 방법은 다른 한 명의 공범에 대해 자백을 하면 자백한 사람은 석방해주는 반면에, 다른 공범은 징역 3년을 선고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상대편 공범이 자백했을 경우에도 성립한다.
누구든 자백하면 자백을 한 사람은 석방되지만, 상대편 공범은 3년의 징역을 받는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모두 자백을 하면 각각 징역 2년을 받으며, 둘 다 자백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하면 증거 불충분으로 각각 징역 1년을 받게 된다.
이 경우 최선의 전략은 상대방이 묵비권을 행사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으므로 둘 모두 자백을 하고 나란히 2년 형을 받는 것이 된다. 자칫 나만 묵비권을 행사했다가 형을 더 길게 받는게 두려워 차악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이 소통이 가능하다면 어떨까? 혹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굳건하게 형성되어 있다면? 아마도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신뢰에 대한 이야기로는 루소가 이야기한 ‘사슴 사냥 게임’이 더 적절하다. 이 게임은 협력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두 명의 사냥꾼은 토끼나 사슴을 잡을 수 있는데, 사슴을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2인 1조로 행동해야 잡을 수 있다. 한 명의 사냥꾼이 사슴을 몰아오는 동안 다른 사냥꾼은 도망치는 사슴을 잡기 위해 길목을 지킨다. 그런데, 길목을 지키고 선 사냥꾼 앞으로 토끼가 지나간다. 저 토끼를 잡으면 오늘의 저녁을 해결할 수 있다. 과연 이 상황에서 사냥꾼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역시 사회적 협력이 가져오는 이익과 신뢰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떤가? 협력과 파트너십이 필요한 상황에서 작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협력을 거부하고 파트너십을 저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 클립아트코리아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틀렸다
재단에서 일하던 시절의 해프닝이 떠오른다. 문화다양성 사업을 진행하며 지역의 한 단체와 밀도 높게 협력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시장에서 열리는 축제를 준비 중이었는데, 어느 날 단체의 사무국장이 하소연하듯 말했다. 프로그램 준비에 재단도 의견을 냈으면 한다고. 우리는 짐짓 단체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파트너로서 온당한 태도라고 생각하고 말았던 것 같다. 비용을 지원하기로 한 다음에는 우리가 개입하거나 내용을 손보려고 하지 말고 행정 영역에서 서포트를 해야 한다고 여겼을 거다. 그런데, 파트너십의 밀도가 높아지면 서로에게 침윤해가는 영역이 반드시 생긴다. 서로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아쉬운 점을 토로하고, 상호관계가 무르익는 과정이야말로 파트너십의 중심이다. MOU를 맺고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번거롭지 않은 성과들을 챙겨가려는 일련의 활동은 파트너십이라고 하기에는 좀 낯간지러운 것이다. 치열하게 논쟁하고 다투는 과정에서 협력의 본질 역시 더 빛날 거라 믿는다.
그래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지원을 구실로 해 실제로는 은근한 회유나 지시에 가까울 이런저런 간섭을 해대는 것은 지원기관이 가질 수 있는 최악의 태도가 맞다. 여전히 기관의 지원이 지원 대상의 활동 영역을 규제할 수 있다고, 혹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2000년대 중반 단체에서 일하던 시절 서울시 주무관 한 명이 시 문화정책에 비판 성명을 낸 것에 대해 ‘서울시 지원을 받는 단체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모르긴 몰라도 숱한 지역에서 반복되고 있는 풍경일 것이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의 씨앗을 만드는 거라고 단호하게 쏘아붙여 줘야 한다.
하지만 ‘간섭하지 않음’을 명분으로 지원 이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저 결과만을 받아보려는 태도 역시 지원조직으로서는 무책임의 소치다. 중요한 것은 무색무취하고, 사고가 나지 않는 안정적인 행정관리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업이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것을 생산하며 시민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주느냐인 것이다.
능숙하지 못한 이들의 연대와 협력
사실, 관계를 중심으로 일을 풀어나가는 사람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어딘가 매끈하지만 느물느물한 그 태도, 사람을 재는 듯한 시선, 어떻게 저 사람을 활용할 수 있을까 바쁘게 돌아가는 머리. 아, 곤란하다, 곤란해.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그런 사람들이 있다>가 절로 떠오른다.
보다 능숙하게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내면과 주변을 말끔히 정돈하고.
모든 사안에 대해 해결책과 모범 답안을 알고 있는 사람들.
누가 누구와 연관되어 있고, 누가 누구와 한편인지,
목적은 무엇이고, 어디로 향하는지 단번에 파악한다.
오로지 진실에만 인증 도장을 찍고,
불필요한 사실들은 문서세단기 속으로 던져버린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은
지정된 서류철에 넣어 별도로 분류한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겨운데, 어떤 이들은 서로의 쓸모와 필요를 탐색하기에 바쁘다. 내게 쓸모가 있는 대상을 빠른 시간 내에 파악하고 그 대상에게 이런저런 공을 들이는 사람을 여러 차례 봐 왔다. 친목을 도모하는 사이가 아니라 일을 하는 관계에서는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비즈니스 영역이 아니라 지역에서의 활동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상대가 지자체든, 재단이든, 단체든, 시민이든 계속해서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들이다. 빠르게 이익을 취하고 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조금 어리숙한 협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세상을 이토록 가파르게 만들어온 효율의 문법이 아니라, 조금 돌아가더라도, 조금 느슨하더라도, 조금 답답해 보이더라도 건너뛰지 않는 마음들이랄까.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기민한 살아남기보다 넉넉한 파트너십을 찾는 것이 그 자체로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죄수의 딜레마에서 최적의 전략을 찾느라 결국 2년을 복역하는 윤똑똑이들보다, 상대를 믿는 서로의 어리숙함이 작동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그림이 낫지 않을까. 토끼 한 마리에 만족하느라 상대를 허탕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지역의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을 도모하는 파트너십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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