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편제마을 국악거리축제를 랜선 중계하기 위해 준비하는 스태프 모습 Ⓒ고재열
우리 지역축제가 천편일률적인 이유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 지역축제를 되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하여 여행감독으로서 꼽아 보았다. 코로나19와 정권 교체로 우리 지역축제가 외우내환을 겪고 있는 지금, 축제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축제는 충분히 더 좋아질 수 있다.
지난 9월 14일, 윤성진 한국축제감독회의 상임이사, 김미소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총감독, 이원재 문화연대 집행위원장 등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축제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주제는 ‘지역축제 이대로 괜찮은가?’ 정권 교체 이후 파행 사례가 잇따르면서 ‘제2의 블랙리스트 사태’를 우려하는 문화운동가들이 모였다.
# 우리 축제에 없는 것 세 가지
얼핏 번성해 보이지만 지역축제는 우리 문화예술계의 사각지대다. 우리나라 지역축제에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일단 ‘기원하는 바’가 없다, ‘일탈’이 없다, 그리고 ‘전복’이 없다. 축제를 축제답게 만들 요소가 없는 것이다. 반면 꼭 있는 것 세 가지가 있다. 몽골텐트와 각설이패 그리고 팔도 풍물 장터다. 그리고 ‘천편일률’이라는 수식어가 붙여진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지역축제가 취소되었다. 일부 축제는 ‘랜선 축제’로 열리기는 했지만 수만 명 혹은 수십만 명을 모으던 오프라인 축제는 지난 2년 동안 볼 수 없었다. 우후죽순으로 생겼던 지역축제가 태풍을 맞은 듯 쑥대밭이 되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번 생각해 볼 질문이 있다. ‘안 열려서 아쉬운 축제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안 열려도 아쉬운 것이 없는 축제라면, 지역축제를 기획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축제의 본질이 생산 활동의 잉여 행위로 비생산적이기는 하지만 아쉬운 것이 없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우리의 지역축제가 축제의 본질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자문회의를 중심으로 여러 방식으로 지역축제에 관여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거대한 벽을 느낀다. 왜 이 축제를 하려는 것인지, 축제가 축제답기 위해 필요한 것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축제에 오는 사람들과 무엇을 함께 하려는지, 이런 기본적인 고민은 사라지고 오직 축제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러들일지, 축제의 성과만 고민한다.
농사짓는 철학자 천규석 작가가 쓴 <잃어버린 민중의 축제를 찾아서>(실천문학사)는 우리 시대의 축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추천하는 책이다. 우리나라 지역축제에 없는 것 세 가지를 잘 꼬집고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기원하는 바’가 없다, ‘일탈’이 없다, 그리고 ‘전복’이 없다는 세 가지가 그가 지적하는 문제다.
사시사철 축제가 넘쳐나는 대한민국에서 그는 축제를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의장을 역임한 그는 농촌 재건을 위해 평생 ‘소농두레’ 운동을 했다. 한살림운동 대구공동체를 만들고, 도시와 농촌의 공존을 도모하는 ‘공생농두레농장’을 운영했다. 마을공동체 활동을 꾸준히 해온 그가 보기에 요즘 지방자치단체들이 벌이는 축제는 축제가 아니었다.
우리 전통 마을굿에서 천 작가는 우리 시대의 축제에 대한 힌트를 찾는다. 마을굿에는 기원하는 바가 있었고, 일탈과 신명이 있었고, 전복이 있었다는 것이다. 상당(산신당)·중당(성황당)·하당(솟대나 장승)을 두어 체계적으로 마을신을 모시던 시절, 마을굿은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진정한 축제였다. 그런데 요즘의 지역축제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남원춘향제 부대행사인 거리퍼레이드에는 지역의 동호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고재열
# 기원하는 바가 없다
축제는 기원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기원의 강도가 축제의 열기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축제에는 이런 기원이 없다. 기원하는 바가 있다면 오직 단체장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뿐이다. 대표적인 도시 축제의 하나인 ‘하이 서울 페스티벌’이 당시 이명박 시장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앙드레김 패션쇼에 이 시장을 중심에 세우고 ‘하이 이명박 페스티벌’로 만든 것이 대표적인 예다.
천 작가는 이를 이렇게 비판했다. “요즘 축제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는 단순하다. 장사꾼은 많이 팔기만을 원하고 참가자들은 재미만을 원하고 국가와 지자체는 이데올로기 선전에 여념이 없다. 이것은 기원이 아니다. 공동체를 위한 기원이 있어야 축제가 성립된다.” 서양의 축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대동제나 풍어제도 공동체의 안녕이라는 기원이 있었다. 그런데 현대의 지역축제는 축제를 위한 축제가 되어버렸다.
기원이 사라진 이유는 관 주도의 관제 축제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연등회와 팔관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사회에서도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축제와 호족이 주도하는 축제가 각축했다. 권력자는 축제 때 고조된 사람들의 감성을 끌어모으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기초 공동체의 자발적 축제가 관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동체가 아닌 용역업체가 축제를 주도하면서 기원을 상실하기도 한다.
아프리카의 축제에는 신명이 있다. 다소 주술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보여주는 케냐의 무용수들. Ⓒ고재열
# 신명이 없다
기원하는 바가 없다는 것 다음의 문제는 신명이 없다는 점이다. 축제의 에너지는 욕망에서 나온다. 욕망을 드러낼 때 신명이 난다. 욕망 중에서는 성적 욕망이 강하다. 그래서 원시사회의 축제는 성적 행위와 관련된 것이 많았다.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도 대동제에서는 성적인 것을 행위가 아닌 말로 풀어내며 탈출구를 찾았다. 그래서 진도아리랑 등 전통 민요에는 남녀의 성기나 성행위를 묘사하는 것이 많았다.
이런 신명을 돋우기 위해서는 금기를 풀어야 한다. 방종이 아니라 에너지를 발산할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 지역축제에서는 통제가 먼저다. 지자체가 축제를 관리하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 천 작가는 이렇게 해석했다. “통제는 사고의 위험과 책임에 대한 우려 때문에 발생한다. 공동체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는 것이다. 축제 기간 어느 정도의 탈법과 위법을 용인해주는 것이 공동체의 힘이다.”
지역에서 상시 축제를 벌인 순천 방랑싸롱에서 플라멩코 무용수 마리솔이 공연하고 있다. Ⓒ고재열
# 전복이 없다
마지막으로 전복이다. 천 작가는 전복이 없으면 축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전복은 권력에 대한 전복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축제는 전복한 것을 기억하거나, 전복하지 못한 것을 전복한 것처럼 가장한다. 조선 시대에 탈을 쓰고 양반과 승려를 비꼬았듯이 일탈과 전복이 있어야 축제가 성립한다.
얼마 전 의정공 김국광 종택에 갔을 때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조선 <경국대전> 편찬을 주도했던 의정공 김국광이 고향인 논산에 와서는 ‘백중놀이’를 개발해 평민과 노비들의 신명을 북돋았다는 사실이다. 며칠 동안 밤낮없이 즐기는 데 조건은 의정공 댁의 장(醬)이 떨어질 때까지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규율의 전범인 <경국대전> 편찬자가 금기를 넘어선 축제를 개발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천 작가는 축제에서 전복이 갖는 의미를 가상의 전복을 통해 현실의 체제를 수긍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해석이다. “겉으로는 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바꾸는 듯 보인다. 사실은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비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정상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잠시나마.”
쿠바의 수도 하바나의 거리축제 모습. 하바나는 일상이 축제가 된 도시다. Ⓒ고재열
# 우리 축제에 필요한 세 가지
많은 지역축제에 초대받고 자문하고 참여하는 여행감독으로서 축제가 기획되고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 지금처럼 공무원의, 공무원에 의한, (선출직) 공무원을 위한 축제에서는 기원과 신명과 전복을 기대하기 힘들다. 축제의 주체가 독립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우리 축제를 되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 세 가지를 꼽아본다면 ‘자존감’과 ‘정체성’ 그리고 ‘판’을 꼽을 수 있겠다.
먼저 자존감 회복이 필요하다. 우리 축제가 천편일률적인 것은 자존감 부족 때문이다. 자존감이 없기 때문에 자꾸만 다른 축제를 따라 하게 되고 따라 하게 되니 똑같아지게 된다. 자존감과 관련해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나라는 ‘쿠바’다. 쿠바의 국민들은 ‘나는 행복하다’ ‘나는 문화예술을 즐기면서 산다’ ‘나는 내 몸을 최대한 활용하고 산다’는 자존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주어진 조건을 탓하지 않고 인생을 즐긴다. 일년 365일 골목골목마다 축제고 잔치다. 그래서 쿠바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차린 행복의 밥상에 기꺼이 숟가락을 올린다.
정체성(아이덴티티)과 관련해서 추천하고 싶은 민족은 ‘티롤(Tirol)’ 민족이다. 축제란 결국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문자답이다. 이탈리아 동북부와 오스트리아의 접경지대인 돌로미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티롤인’이라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오스트리아였다가 이탈리아에 복속된 이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이를 축제로 확인한다. 축제란 이렇게 정명(正名), 즉 이름을 세우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축제란 판을 까는 일이다. 참가자들이 축제를 판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축제가 되는데 우리의 축제는 ‘어설프게 차려진 밥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에든버러축제가 전 세계 공연예술의 중심 축제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판을 깔아 주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초대받지 못한 공연자들도 스스로 판을 깔고 재능을 펼친다. 우리 축제에서 보고 싶은 부러운 풍경이다.
이탈리아 돌로미테 지역의 맥주축제 모습. 축제를 통해 티롤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한다. Ⓒ고재열
# 사라진 우리의 축제를 찾아서
기원이 있고, 신명이 나고, 전복을 도모했던 우리의 전통축제는 일제 강점기와 군부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천 작가는 일제의 통제와 기독교의 복음과 새마을운동의 영향으로 축제의 전통이 사라졌다고 분석했다.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제는 대동굿을 없앴다. 교조적인 형태로 들어온 기독교는 무당이 행하던 초보적인 기복신앙만 수용하고 마을굿을 배척했다. 새마을운동도 이를 ‘헌마을의 관습’으로 치부하고 타파했다고 그는 분석했다.
축제가 사라지는 과정은 전통사회에서 마을굿을 주관하던 무당이 몰락하는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전통사회에서 공동체를 위한 기원을 주관하며 권력자의 대항마로 나름 역할을 담당했던 무당은 불교에 밀려 권력을 내주고 유교에 치여 천민으로 전락해 개인의 기복을 빌어주는 일 정도만 수행한다. 그마저 기독교에 역할을 내주면서 역할이 거의 사라졌다.
우리 지역축제에 없는 것 세 가지와 우리 지역축제에 필요한 것 세 가지를 꼽아보았다. 축제에 정답은 있을 수 없지만 우리의 전통축제에서 충분히 힌트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한바탕 신명 나게 놀면서 지난해의 앙금을 잊고 새해 농사를 준비하던 우리의 대동제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농경사회였던 우리를 지탱해 오던 축제의 전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의미를 발할 수 있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참외를 주제로 한 경기도 여주시의 축제 행사장 입구. 전형적인 지역축제 모습을 보여준다. Ⓒ고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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