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축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지난해 첫 행사를 마치고, 올해 겨우 2회차를 맞고 있는 ‘갓 난’ 축제들의 이야기다. 통영섬지니협의체가 통영 인근의 아주 작은 섬들을 돌며 판을 벌이고 있는 영화제, 음악제, 섬마을학교 등의 공통점은 섬의 오래된 미래를 비춘다는 것이다. 축제는 화려하지 않고, 미래가 밝지만은 않지만, 그게 이 축제가 지속가능한 이유다.
통영섬지니협의체를 만들고 섬중심 공정여행사 삼인행을 이끌고 있는 이동열 대표농부를 사량도에서 만났다. Ⓒ천소현
협의체는 지난해 처음으로 섬마을영화제와 뿔난섬음악제를 개최했다. Ⓒ천소현
영화에서 시작된 한 판 치유의 굿
“섬은 공동체 문화가 강하게 발달한 곳이라서 제사를 많이 지냈어요. 정월 대보름굿이나 별신굿 같은 게 중요했는데, 지금은 뭐 거의 다 사라졌죠. 젊은 사람들이 줄면서 굿을 할 사람도 없고, 굿이 보존회다 뭐다 행정적으로만 유지되면서 공동체 의식도 줄었습니다. 깊이 못 들어가고 표면에 있다가 증발되어 버려요.”
이동열 대표농부는 굿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기를 원했다. 그는 2020년 통영섬지니협의체(이하 섬지니)를 결성하고 섬중심 공정여행사 삼인행을 이끌고 있으며 소소한 축제를 총괄하는 책임자다. 본격적인 이야기 전에 섬마을영화제, 뿔난섬음악회 등 축제를 바라보는 초점을 미세하게 조정하자는 것이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방문자의 만족을 위해 유흥과 편의를 제공하는 이벤트성 축제가 아니라 섬주민이 중심이 되는 한 판의 난장이다. 갈등이 증폭되기도 하지만 스르르 녹기도 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제사와 굿을 일정 부분 대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2박 3일 동안 섬에 살면서 영화와 주민을 만났다. Ⓒ통영섬지니협의체
‘노을이 지면 영화가 시작됩니다’는 슬로건이 현실이 된 밤. Ⓒ통영섬지니협의체
지난해 6월에 열린 제1회 섬마을영화제의 일화를 소개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개막작이 개최지인 우도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우도마을 다이어리>(2021년, 21분)였다. 인구 20명이 사는 작은 섬 우도마을에서 좋으나 싫으나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14명의 우도 주민이 전하는 섬의 삶을 담았다. 문제는 상영 후에 터졌다. 각자의 입장이 있다 보니 불편함 마음이 번져 작은 언쟁으로 이어진 것. 그동안 쉬쉬하거나 꾹꾹 눌러 담아온 이야기가 영화라는 물꼬를 만나 터진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다음날 ‘배우님! 영화 잘 보았습니다!’라는 관람객들의 인사에 조금은 머쓱하게 ‘화해 없는 이해’로 누그러졌다는 이야기다. 한판 ‘생난리 굿’ 끝에 세계가 갈라지기도 하지만, 다시 메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물양장을 정리해 야외 상영관을 만드는 경험, 집집마다 손님들이 떠들썩하며 섬 전체가 하나의 축제장이 되는 경험을 통해 주민들은 자부심을 얻었다.
제2회 섬마을영화제는 추도 주민을 중심으로 조촐하게 진행됐다. Ⓒ통영섬지니협의체
영화제에 대한 주민들의 호응이 컸던 2022년 9월의 추도 섬마을영화제 Ⓒ통영섬지니협의체
오직 추도 주민들을 위해 <블랙머니>의 정지영 감독과 조진웅 배우가 GV에 참석했다. Ⓒ통영섬지니협의체
지난 9월 23~24일에 추도에서 진행된 제2회 섬마을영화제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최근 심각해진 지하수 고갈로 대항 마을과 미조 마을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식수가 부족해 고통 중인 섬에 사람을 더 부를 수 없으니 조촐하게 주민들끼리 영화제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관람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화제를 개최하는 이유는, 이 영화제의 원래 주인이 섬주민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섬마을영화제 초청작의 선정 기준은 무조건 GV(관객과의 대화)가 가능한 영화여야 한다. 지난해 상영작 7편이 모두 그랬다.
섬주민의 ‘문화 향유권’에 대한 이야기다. TV도 있고 OTT도 있으니 영화를 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으나, 섬에서는 감독이나 연기자를 직접 만날 기회가 매우 제한적이다. 올해는 <블랙머니>의 정지영 감독과 조진웅 배우가 이 뜻에 공감해 GV에 참석했고, 여행자의 관점에서 추도를 담아낸 두 편의 단편을 제작해 상영했다. 지속가능한 섬 영화제를 논의하는 ‘섬주민 포럼’ 자리에서는 물 부족 문제로 인한 두 마을의 오랜 갈등도 조금은 해갈이 되었다는 후문이다. 영화제에 대한 주민들의 의지가 크고 부산영화제에 깊이 관여했던 전수일 감독이 몇 해 전 추도로 귀촌해 힘을 보태고 있기에,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중이다.
더 많은 뿔난섬을 소망하는 기원제
뿔난섬음악회가 조망하는 섬의 미래는 밝지 않다. 2021년 10월 사량도, 수우도, 추도에서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음악회는 해양 쓰레기를 수거하는 ‘기후 행동’과 ‘음악회’가 결합된 형태였다. 기후 재앙 앞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섬 환경은 이래저래 뿔이 난 상태이지만, 그 심각성에 대한 인식과 경각심은 아쉽게도 섬주민에게서 가장 낮게 나타난다. “내일 되면 또 쓰레기가 밀려올 텐데 치우면 뭐 해?” 주민들의 말을 증언하듯 사량도 모래사장에는 육지에서 밀려온 해양 쓰레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뿔난섬음악회는 ‘행동하면, 섬은 노래가 됩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주민과 참가자들이 구역을 돌면서 쓰레기를 수거해 나가면 어느 순간 노래와 연주가 울려 퍼진다. 그 순간 하늘과 바다가 무대의 백드롭이 되고, 해변은 야외 객석이 된다. 관람료는 이미 수거한 쓰레기다. 중요한 것은 스타성 출연진과 모객 인원이 아니라 참여자들의 인식과 경험이다. 그래야만 더 많은 섬들이 뿔난섬(Plastic No’n Seom)이 될 수 있다.
사량도, 수우도, 추도에서 열린 제1회 뿔난섬음악회 무대에 선 ‘개똥이 어린이 예술단’ Ⓒ통영섬지니협의체
연주가 시작되는 곳이 무대고. 수거한 쓰레기가 관람료다. Ⓒ통영섬지니협의체
육지에서 밀려온 쓰레기가 쌓여가는 사량도 해변 Ⓒ천소현
올해 뿔난섬음악회는 10월 28~30일에 연대도에서 열릴 예정이다. 통영은 물론 경남 지역에서 기후 위기에 공감하는 뮤지션들이 참여할 예정이고, 주민합창단도 공연을 준비 중이다. 지난 영화제에 참석이 불발되어 아쉬운 사람들, 지난해 음악회의 아름다운 노을과 음악을 잊지 못하는 이들이 학수고대 중인 2박 3일이다. 지난해 섬마을영화제에는 주민, 스태프, 관람자까지 100여명이 함께 했었다. 올해 음악제에 200여 명이 와 준다면, 축제는 독립적인 재정으로 지속가능하다. 손님을 잘 대접하려고 노력하고 부족한 숙박은 캠핑으로 보완하겠지만 그래도 주인공은 주민이다. 시장님이 와도 마이크를 넘기지 않는다.
섬을 지고 가는 섬 진이 그리고 섬지니
축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사실 영화제와 음악제, 현재 구상 중인 연극제 등은 ‘섬 잇다’라는 큰 그림을 위한 개별 프로젝트일 뿐이다. 대한민국의 섬들은 대부분 비슷한 지역 문제를 안고 있다. 지역 소멸과 소외의 해결에는 늘 뒷전이지만 기후 재앙에는 최전선에 놓인다. 통영 앞바다에만 570여개 섬(섬,서,여 포함)이 있고 그 중 40여 개가 유인도다. 이 섬들을 다리가 아니라 문화와 사람을 통해 이어 나가야 섬의 소외가 줄고 공동체가 넓어질 수 있다. 우선은 ‘섬마다 어울리는 문화 콘텐츠가 있다’는 생각으로 영화제, 음악제 등 문화 행사를 순환하며 개최하고 있다.
“섬의 소멸은 불가역적이라고 생각해요. 한번 무인도가 되면 다시 사람이 살기가 거의 불가능하죠. 섬에 남아 있는 노인들을 보다가 느낀 감정이, 노인들이 섬을 지고 있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우리 협의체의 이름이 통영섬지니 입니다. 살짝 ‘램프의 지니’를 떠올리기도 했고요.”
청소년 20명을 초청한 시인학교는 섬을 기부하는 캠페인이었다. Ⓒ통영섬지니협의체
섬마을시인학교. 섬을 여행하며 아이들은 훌쩍 성장했다. Ⓒ통영섬지니협의체
때로는 섬 자체가 ‘램프의 지니’가 되어주기도 한다. ‘시인학교’는 축제라기보다는 ‘섬 기부 캠페인’으로 기획된 것이다. 지난해 5월 첫 행사에는 뮤지컬 배우를 지망하는 청소년 20여 명을 초대했다. 아이들은 2박 3일 동안 섬을 여행하고 갯바위에서 함께 노래하고, 쓰레기도 줍고, 밤새워 이야기를 나눴다. 시를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의 감동이 섬에서 일어나기를 바랐는데, 그대로 이루어졌다. 사실 시작은 ‘섬 하나가 하나의 강의실이면 어떨까?’라는 상상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섬마을학교’를 열었고, 시인학교는 그 첫 번째 강의실이었다. 섬 기부 행사는 취약계층과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매년 정례화할 예정이다.
구심점이 되고 있는 통영섬지니협의체에는 8개 섬(한산도, 추봉도, 욕지도, 우도, 사량도, 수우도, 추도, 소매물도(예정))에 사는 40여 명의 주민이 속해 있다. 통영리스타트플랫폼에 사무실을 두고 농어촌 관광 개발과 지역 발전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모색하고 있다. 그 출발점에 먼저 선 이가 바로 이동열 대표농부다. 부산 출신이지만 아내의 고향인 욕지도로 귀농한 후 처음엔 의욕 끝에 반발심만 샀던 그는 무려 10년을 기다려 욕지도의 공인 ‘이서방’이 된 후에야 뜻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게 2020년이었고, 곧바로 코로나가 터져 여행 프로젝트는 중단되었지만, 방향을 바꿔 협의체를 구성할 수 있다. 부산에서부터 시작한 농민운동, 먹거리운동의 오랜 경험에 지속가능한 섬 공동체를 꾀하는 일을 덧대어 섬과 사람을 잇고, 깁고 있다.
섬을 구독할 수 있을까요?
“영화제나 음악회 모두 2박 3일 패키지의 여행 프로젝트로 진행하고 있어요. 지자체나 관련 종사자들은 방문객이 많은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성수기에 여행자들이 몰리면 욕지도에 사는 저도 배에 차를 못 실어요. 오버투어리즘으로 섬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는 겁니다. 사실 1,000명이 당일로 다녀가는 것보다 1박으로 500명이 오는 게 나아요. 그 돈으로 여행자와 주민들이 함께 영화도 보고, 고기도 굽고, 막걸리도 마시는 거죠.”
통영섬지니협의체와 삼인행 사무실은 통영리스타트플랫폼에 입주해 있다. Ⓒ천소현
협의체에는 8개 섬, 4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천소현
협의체와 여행사는 모든 축제와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주관한다. Ⓒ천소현
통영섬지니협의체와 예비사회적기업인 (주)삼인행은 램프와 지니처럼 불가분의 관계다. 여행자들을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섬으로 모으기 위해, 그리고 외부의 시선이 아닌 섬의 관점으로 준비하기 위해 ‘섬중심’ 여행사가 꼭 필요하다. 섬 여행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높고, 편의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서적인 환대와 주민들과의 관계 형성은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한 경험이다. 섬의 특성상 오버투어리즘을 경계하면서도 안정적인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B2G(business to government) 모델을 추구하고 있다. 여러 지자체를 방문해 섬여행 플랫폼과 문화 콘텐츠에 대해 설명하고 관심과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섬마을 여행 플랫폼이다. 시즌마다 특정 섬으로 몰려드는 것이 아니라 매달 대한민국의 어느 섬 한 곳에서는 꾸준하게 영화제든 음악제든 주민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이벤트가 열려서, 사람들이 그곳을 방문할 수 있게 이어주는 ‘섬마을 구독 서비스’를 구상 중이다. 또 다른 플랫폼은 사람이다. 섬 여행에 대해 물으면 대부분 ‘혼자 여행하기에는 위험한 곳’이라고 대답해 왔다. 그렇다면, 비상시 혹은 평상시에도 믿고 갈 수 있는 섬여행의 물리적, 인적 플랫폼으로 ‘섬지니’를 꾸려보기로 했다. 우선 욕지도에서 이동열 대표농부의 가족이 운영하는 ‘무무베이커리’가 첫 번째 섬지니가 되었고, 사량도에는 통영섬지니협의체에서 운영하는 카페 겸 게스트하우스인 ‘사량도 무무×유숙’이 올해 문을 열었다. 이렇게 편안한 숙소 밖이 사량도라니, 섬 혼행(혼자 여행)에 비빌 언덕, 믿을 구석이 생겼다. 섬지니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예정이다.
올해 사량도에 오픈한 ‘무무×유숙’ 게스트하우스 겸 카페는 사량도의 ‘섬지니’다. 여행자가 믿고 비빌 물리적, 인적 플랫폼이다. Ⓒ천소현
찬란했던 사량도의 노을 Ⓒ천소현
이동열 대표농부는 잃어버린 추도의 배를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천소현
바다에서 피어 섬으로 지더라도
태풍 힌남노가 통영을 (아직까지는) 향하고 있던 태풍 전전야 즈음, 사량도에서 마주한 노을은 걱정을 딛고 섬으로 온 모든 이유가 되어 주었다. 소중한 것이 하나 탄생하는 위대한 몰입의 시간에 이동열 대표농부가 눈에 노을을 가득 담은 채 추도의 배 이야기를 꺼냈다. 78세 할아버지가 태어나기 전부터 바다를 드나들던, 족히 100년은 되었을 배가 지난해 어느 새벽 줄이 풀리면서 홀로 먼 바다로 떠나갔다는 것이다. 그 배를 생각하니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고 했다.
“당신은 바다로 피어 섬으로 지는 한 송이 꽃입니다.”
잠시 마음을 놓고 있는 사이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섬의 소멸은 불가역적’이라고 말하던 그가 다짐인 듯 말했었다.
“지켜 낸 경험이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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