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서치 이덕무, ‘미쳐야 미친다’에 매혹되다
내가 숭상하는 단어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사자성어다. 그 글의 근원과 유래는 더듬어보지 않았지만 가슴에 팍 꽂히는 순간이 있었다. 독서에 미쳤던 한 사람의 궤적을 엮은 정민 교수의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이덕무(1741-1793)라는 실학자를 만나고부터였다. 고전 속의 사람이 내 벗인 것 마냥 반가웠고, 마치 나의 롤모델 같아 흥미로웠고, 내가 그분의 페르소나 같은 역할을 해도 좋을 것 같아져서 그분을 흠모하기 시작했다. 갓 서른이 넘은 나이에 만난 이덕무를 다시 ‘미쳐야 미친다’라는 책에서 또 만났을 때 잠시 주저하던 나는 ‘저 분 같은 삶을 살아야겠어’라고 굳게 다짐했더랬다.
책장의 수 많은 책들
서른 중반 무렵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어느 한 분야에 천착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았고, 나 또한 그런 다짐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두루뭉술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서도 문득, 혹은 갑자기 그분의 생애가 툭 튀어나오는 적이 많고도 많다. ‘간서치’라고 불리는 별명을 가진 이덕무는 요즘 저잣말로 하면 ‘책충이’라고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 책벌레 혹은 ‘책만 읽는 바보’라고 했으니 말이다. 서얼이라는 신분이 갖는 한계는 이렇다 할 벼슬길에 나서지도 못하는 것이 제약이었던 사회에서 어쩌자고 그는 책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지만, 책은 그에게 벼슬과 밥술을 넘어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날리고, 당대의 기라성 같은 벗들을 사귈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왕이 그의 재주를 끝까지 신봉하게 만든 힘을 가졌다.
그의 글과 행적을 들은 대왕 정조는 그를 불러 청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 중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오도록 하고, 바로 뒤를 이어 규장각의 외각검서관으로 임명한다. 대놓고 좋은 벼슬을 주지 못하는 신분상의 한계를 검서관을 통해 더욱 책에 전념하라는 부추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규장각에 있는 그에게 정조는 다시 박제가, 백동수 등과 함께 삼한의 무예를 정리해야 되지 않겠냐며 ‘무예도보통지’를 비롯한 다양한 책의 편찬에 기여하도록 했다. 그 외에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가슴으로 담아 두었던 것을 집필한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라는 책을 비롯한 다양한 역사서와 시문집이 있다. 정조는 그의 사후에 내탕금을 내어 ‘아정유고’라는 책을 규장각에서 편찬토록 하기도 했다. 훗날 아들 이광규는 아버지의 글을 모아 ‘청장관전서’라는 33책 71권을 간행하여 지금에 전한다.
향토사 전문책방 ‘이목구심서’를 열다
향토사전문책방 '이목구심서' 푯말
이런 분을 내가 존경하는데 다른 이유가 따를 리 없다. 한편 나는 이덕무를 통해 내가 애지중지하는 몇 가지 단어도 가졌다. 책만 읽는 바보를 뜻하는 간서치, 맑고 청량하며 먹는 것도 그런 깨끗한 것만을 먹는 해오라기를 뜻하는 청장관(靑莊館), 그리고 이목구심서…. 2018년 광주 대인시장의 예술감독을 내려놓을 때 그 20년 전을 더듬어 생각했었다. 담양의 소쇄원에서 머리가 무우처럼 하얗던 어르신이 서울말로 두 시간을 조선 최고의 민간정원이라는 이곳을 설명할 때 관광을 전공한 내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던 시간…. 곧장 종손을 뵙고 1년만 살게 해 달라고 애원했던 그날을 떠올리며 미친 듯이 일했으니, 내가 좋아하는 일 좀 해 봐야지 하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리고 내 고향 담양의 곳곳을 찾아다니며 책방을 열 만한 곳을 고르기 시작했다. 위치는 “어디여?”라고 말하면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곳 근처이지만 막상 찾으려면 쉽게 찾지 못하는 곳이면 안성맞춤인데, 과연 5개월 만에 그런 곳이 나왔다. 관방제림 곁 국수거리에서 한 블럭 떨어진 곳, 옛적 죽세공품을 수작업에서 기계와 반반 나누어 돗자리를 비롯한 다양한 반(半)자동 죽물을 만들었던 공장이었던 곳이었다.
향토책방을 찾아주신 (좌측부터) 전남대학교 나경수교수, 향토책방 전고필 대표, (전)한국문화재재단 진옥섭 이사장
정문은 좁은 골목이고, 뒷문은 안집을 통과해야만 도달하기에 어찌 보면 손님은 아예 오지 말라고 하는 것과 다름 아닌 곳이었다. 그리고 집과 사무실에 있는 책을 옮기기 시작했다. 족히 5천여 권은 넘었고, 그 책은 대부분 지역의 향토사를 담은 책이 주종을 이뤘다. 하는 일이 문화기획과 문화관광과 연관된 일인지라 내게 이런 자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물과 같은 것이었다. 기억력이 점점 아물거리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가물거리며 남아 있음직한 내 지문(指紋)이 닳아 있는 것들이었다.
향토사전문책방 ‘이목구심서’ 토의 모습
책방의 이름 이를테면 상호를 두고 잠시 망설임의 시간이 있었다. ‘간서치’라는 이름이 맘에 드는데, 2014년 후배가 북카페를 연다고 할 때 이미 선물해 버렸었다. 한데 이 후배의 북카페는 모든 식기와 응대 세트가 ‘북카페 간서치’였음에도 불과 두 달도 안돼 이름을 폐기했었다. 지난 얘기지만 지금도 ‘앙금’이 남는다. 사연인즉 사람들이 간서치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았는데, 유사언어로 ‘간수치’는 잘도 알아서 저 빛나는 이름인 간서치를 자꾸만 간수치로 불러서 마음이 상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눈물을 머금고 카페의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좌) 향토사전문책방 ‘이목구심서’ 참여자 안태호 대표 (우) 책방에 함께한 이들
하니 청장관은 더 사람들이 모를 것 같고, 어차피 모를 것이니 ‘이목구심서’로 가면 할 말이 더 따라 붙겠다 싶어지는 것이었다. ‘향토사 전문책방 이목구심서’가 나오는 과정은 그러했다. 한데 또 하나의 걱정이 생겼다. 천만 원을 주고 책방과 사무공간을 만들어주라고 했던 지라 공사를 맡은 목수 후배가 사무공간과 카운터를 제외하고는 사방을 책꽂이로 가득 비워 놓은 것이다. 심지어 사무공간에도 책장이 따라붙어 있을 정도로 그야말로 “책, 책, 책”이었다.
‘말술학교’에서 내공을 기르다
빈 책장을 보며 시름이 주름으로 바뀔 무렵 잔꾀가 생각났다. 경향 각지의 벗들로부터 책을 기증받아 보자는 신박한 아이디어였다. 그간 벗들과 어울린 것과 마신 술을 합치면 영산강 정도는 채울 양인데, 라는 치기도 일면서 말이다. 그렇게 여기저기 전화를 해 대며 협조가 아니라 반강제까지 동원하여 그대 동네의 내력을 담은 책으로 보내 달라고 들이밀었다. 다들 내공이 있는 지인들인지라 그렇게 책장의 태반이 원하는 방향대로 채워져갔다. 허용 가능한 범위를 문화 부분까지 확대하니 책방을 연 지 여섯 달 만에 더 꽂을 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사이의 책 판매는 내 예상과 딴판이었다. 며칠에 한번 오는 손님이지만, 그렇게 고맙고 반가운 분들이 고르는 책마다 내가 애지중지하는 것뿐이었다. 다시는 구하지 못할 책들을 내어주어야 하는 그런 쓰린 마음은 책 좀 읽어본 이들은 다 알 것이니 더 언급하면 구차한 짓이 된다. 그렇다고 책방 문을 닫을 수도 없고, 열고 있으면 내 뼈 하나가 나가는 것 같은 아픔이 짓누르니 진퇴양난이었다. 결국 대안은 책을 파는 것이 아니라 기증하는 것이 더 낫겠다 싶어졌다. 그다지 진귀한 것도 아닌데, 다만 쉬이 구할 수 없는 지역의 내력(來歷)에 관한 것이니 입수하고 싶을 것인데 이런 것을 거래한다는 것이 양심에 걸렸던 것이고, 기왕에 나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졌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또 하나 계획했던 일들을 도모했다. 바로 <말술학교>를 운영하는 것이다. 책이 마음의 결실이라면, 이것을 실행하는 것은 입술과 손이다. 특히 오늘날은 언어의 기술이 더욱더 분명하게 요구되는 사회이다. 책을 지은 사람들, 책을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생애담이건 인생의 한 눈대목 한 자락을 펼쳐주는 ‘말로 하는 책 듣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이다. 그리고 책 하면 너무나 엄숙해져야 하고 정갈해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마시는 술로 경계를 허문 그런 학교를 운영해 보는 것을 실행에 옮겼다.
책방과 인접한 지역의 분들보다는 접하기 어려운 먼 곳의 사람들을 불러 술잔을 기울이며 진솔하게 때로 과하게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고, 이것을 듣다가 공감하고 질문하고 의기투합하고 때론 격론하는 장으로서의 말술학교! 책방의 책이 비워진다면, 말술은 늘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 이목구심서가 갖는 상호명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방침으로 말이다.
경상도에서, 강원도에서, 충청도에서, 서울에서 나의 벗들이 한 달꼴로 책방을 찾는다. 벌써 20명째다. 나는 이들을 위해 방을 구해 놓고, 이곳저곳에서 벌어온 30만 원을 강사비로 노란봉투에 담아두고, 청강하며 합류하는 이들에게는 ‘1인당 3만 원’을 받아 술값과 밥값과 숙박비로 쓰면서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불 꺼진 담양 읍내를 누빈다. 그 옛날 이덕무가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홍대용 등과 어울려 백탑파를 형성했듯이. 그렇게 ‘말술’은 서로에게 선한 앙금으로 남아 내공이 되고, 달빛에 그을리며 문장이 되고, 해가 뜨면 실행으로 현장을 누비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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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불, 미치광이 광, 미칠 급.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미치광이처럼 그 일에 미쳐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 (출처: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조선 후기 학자·문인인 이덕무의 잡저. 제목에 나타난 바대로 귀로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입으로 말한 것,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은 것으로 여러 가지 서적을 읽으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초출(抄出: 필요한 부분을 골라서 뽑아냄)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