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젊은 양반, 서울에서 오셨당가. 밥이라도 한 끼 먹고 햐.”
광주 남구 방림동, 구수한 아짐 손맛 담긴 밥상을 선물받았다.
푸근한 어머니의 맛이었다.
‘밥 한번 먹자, 진짜 밥 한번 꼭 살게, 바빠도 밥은 꼭 챙겨, 밥은 먹고 다니냐, 앞으로 밥도 없을 줄 알아!’ 고마움, 반가움, 걱정, 위로, 분노 같은 감정들, 한국인은 밥으로 표현한다. 우리에게 밥이란 가장 강력한 메시지이자 관심이며 사랑이고, 무엇보다 함께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어느 날, 광주 남구 방림동으로 향했다. “아이고, 날씨가 이리 끄무레해서 우째. 아침부터 서울에서 오셨는데, 밥 한 끼 먹고 햐야지.” 오색빛 협동조합 ‘방림아짐’의 인사는 엄마를 닮아있었다.
“혹시 ‘오색빛’이라는 이름은 5가지 색을 뜻하는 건가요?”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세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오색빛은 깨달을 오(悟), 찾을 색(索), 그러니까 ‘나의 깨달음을 찾는 빛’이라는 의미예요. 각자가 스스로 빛나는 무언가를 깨닫고 찾을 수 있도록 저희가 이정표의 역할을 자처한 것이죠. 동시에 5가지의 색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중의적인 표현이에요. 오색빛은 ‘청, 경, 지, 장, 고’를 바라봅니다. 청은 청년, 경은 (경력)고용중단여성, 지는 지역아동센터, 장은 장애인, 고는 고령자. 그들이 스스로 빛날 수 있도록 든든한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노력 중이에요.” (오색빛 협동조합 김희경 기획팀장)
오색빛 협동조합은 광주 방림동 터를 잡은 사회적 기업이다. 교육과 배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문화예술 지역공동체 실현과 지역사회 가치실현을 추구한다. 방림동은 과거 비만 오면 광주천이 범람하여 피해를 입자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방제골’ 또는 ‘방역골’이라고도 불렸단다. 오색빛 협동조합의 시작은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한지 공예 클래스였다. 한해 한해 발전되어 가는 아이들의 문화적 역량을 체감하며 교육에 대한 즐거움과 필요성을 느꼈고 이후 청소년 대상, 중장년층 대상으로 연령층을 빠르게 확장하며 문화예술의 가치를 지역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진, 가죽공예, 음악, 음식 등 흥미롭고 폭넓은 주제 선정을 통해 지역민들의 흥미를 자극했고, 그 결과 현재 광주 방림동 주민 대다수가 회원으로 활동 중이란다. 오색빛 협동조합은 멈추지 않고 더 큰 목적을 향해 나아갔다. 교육을 매개 삼아 세대를 전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그러니까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지역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마침 광주 방림동 주변에 대규모 ‘청년임대주택’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주 방림동은 고령자의 비중이 많은 동네다. 오색빛 협동조합은 동네 회원들에게 화두를 하나 던졌다. ‘청년층과 노년층의 갈등으로 지역사회의 세대 층이 분리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아짐(아주머니)들이 뭉쳐 세대와 상관없이 소통할 수 있는 시간과 창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자리가 ‘방림아짐’이 차려주는 밥상, ‘밥상머리, 건잠머리’다.
“방림아짐?”
“우리(방림아짐)는 무슨 단체라기보다 그냥 광주 방림동에서 애들 키우는 아주머니들이에요. 방림에 사는 아짐, 그러니까 그냥 엄마지, 엄마. 오색빛 협동조합에서 기획한 문화 프로그램을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어요. 춤을 배우던 사람도 있고, 그림을 배우던 사람도 있고, 서예를 하던 사람도 있고.” (방림아짐 이승자 회장)
“어떠한 보상도 없는데, 도대체 왜 청년들을 위한 밥상을 준비하기 시작한 건가요?”
“세대적인 격차를 줄이는 행사가 마을 자체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보다 재밌어요, 오색빛 협동조합에서 장소도 제공해 주고 재료도 주면, 우리는 그냥 요리해서 동네 애들 밥도 양껏 먹일 수 있잖아요. 이런 일은 어떤 보수를 바라고 시작하면 절대 오래 못 가요. 그냥 애들 밥 당연히 먹일 거 내가 직접 해서 먹인다고 생각해야지. 오색빛 협동조합에서 차비도 줘요! 얼마나 좋아(웃음).” (방림아짐 임미숙 회원)
대화 내내 방림아짐들의 입가에는 흐뭇함이 감돌았다. 자식이 잘 먹는 상상만 해도 기분 좋은 엄마의 미소. 방림아짐은 밥상머리만큼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소통 방법 없다며 강조했다. 살아온 세월이 증명하는 확신이라고. 방림아짐이 준비하는 음식은 지역에서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일종의 터널인 셈이었다.
“밥상머리는 알겠는데, 건잠머리가 뭐죠?”
“건잠머리는 목수가 조수에게 일을 시킬 때 대략적인 작업 방식을 미리 가르쳐주고, 이에 필요한 연장 및 기구를 준비해 주는 것을 뜻해요.” (오색빛 협동조합 김희경 기획팀장)
‘밥상머리, 건잠머리’는 오색빛 협동조합 회원들로 구성된 동아리 ‘방림아짐’이 청년들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교류 프로그램이다. 광주시에 거주 중인 만 17~34세 이하 청년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2~3명 정도의 방림아짐들이 모여 3~4명 정도의 청년들을 위해 밥상을 준비한다. 평균적으로 ‘밥상머리’를 준비하는 데는 3시간가량의 정성을 쏟는다. ‘건잠머리’는 오색빛 협동조합이 자처했다. 방림아짐이 청년들에게 제공할 메뉴를 정하고 재료 리스트를 만들면 그것을 받아 근처 시장으로 향해 꼼꼼히 장을 봐온다. 정성으로 차려낸 밥상에 오순도순 둘러앉아 식사가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이야기꽃이 활짝 피기 시작한다. 재미있었던 이야기, 힘들었던 이야기, 동네의 이야기, 더 나아가 세대 간의 이야기까지, 위로하고 위로받는다. 영락없는 명절날 가족의 모습. 식사시간만큼 아짐과 청년은 부모와 자녀가 된다. 지역은 가족이 된다.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관계가 단단해진다. 최근 오색빛 협동조합은 청년들에게 밥상뿐만 아니라 그 맛의 원천까지 선물했다. 방림아짐의 손맛과 그 손맛에 담긴 이야기를 함께 엮어 <방림아짐 손맛 이야기> 레시피북을 만들어 1인 가구 청년들에게 제공했다. 매번 같이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혼자라도 잘 차려 먹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청년들과 식사를 같이하면서 주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청년들이 우리의 음식을 그냥 맛있게 먹듯, 우리(방림아짐)도 그냥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는 거죠. 우리도 지금은 늙었지만 예전에는 다 청년이었잖아요. 우리의 그 시절과 오늘 청년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우리 세대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배워가는 과정인 거예요. 그런데 맨입으로 배우면 되겠어? 애들 맛있는 밥이라도 맥이면서 듣는 거지, 오래 붙들고 있지도 않아. 길어야 1시간? 바쁜 애들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면 안 돼.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이거예요. 요즘은 남이 주는 음식을 절대 함부로 받아먹지 말아야 하는 세상이라고. 맞는 소리긴 한데, 괜히 섭섭한 기분이 들었어요. 적어도 우리 지역에서만큼은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관계 형성의 장을 활발하게 유지시켜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어요. 우리가 방림아짐을 스스로 자처해 주말마다 밥상머리를 준비하는 이유고, 오색빛 협동조합이 방림아짐의 건잠머리를 자처해 좋은 재료를 고집하는 이유에요.” (방림아짐 이승자 회장)
오색빛 협동조합의 건잠머리는 지역내 다양한 세대가 밥상머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생각을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방림아짐의 건잠머리는 청년들에게 사랑 담긴 밥상머리를 선물했으며, 무엇보다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며 필요한 비빌 언덕을 자처했다. 밥상머리에 초대된 청년들 역시 방림아짐에게 보다 넓고, 다양한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광주 남구 방림동, 바글바글 등갈비찜이 끓고, 고소한 전 내음이 풍겨온다. 빨갛게 무쳐진 무채 옆자리에는 푸릇한 시금치무침. 쫀득한 찰밥과 김 폴폴 나는 소고기 무국. 아짐의 밥상처럼 조화롭게 엉킨 방림동의 부엌에선 오늘도 교류를 위한 건잠머리 준비가 한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