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봐요, 우리
지역 커뮤니티 플랫폼으로 본 하이퍼로컬의 시대

글‧사진 | 트래비 곽서희 기자

외식, 중고 거래, 소소한 만남들까지.
이젠 동네가 곧 놀이터다.
하이퍼로컬의 시대가 열렸다.

로컬 그 이상의 로컬

오전 10시, 집 앞 근린공원. 부스스한 머리로 슬리퍼를 끌고 도착했다. 양손엔 스웨터와 청바지. 지난해 야심차게 사놓곤 두 번밖에 안 입은 녀석들이다. 째깍째깍, 약속시간이 되자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온다. 역시 부스스한 머리에 슬리퍼 차림, 노란색 맨투맨에 갈색 머리. 인상착의로 보아 그녀가 확실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말을 건넨다. “혹시…당근이세요?”

로컬 그 이상의 로컬, 하이퍼로컬(Hyperlocal, 지역 밀착)의 시대가 열렸다. 사람들의 생활 반경이 시·군·구 등 기존의 로컬보다 더 좁은 지역. 그러니까 진짜 ‘우리 동네’로 좁혀지는 중이다. 말하자면, 슬리퍼 같은 편한 복장으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슬세권’으로. 이러한 트렌드의 선두에 있는 건 하이퍼로컬 플랫폼들이다. 가까운 위치에 있는 지역 주민들의 연결 및 소통을 돕고, 지역 기반의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는 플랫폼으로, 국내에선 당근마켓이 대표적이다.

ⓒ 당근마켓 홈페이지

ⓒ 당근마켓 홈페이지

네이버 카페 이웃 페이지ⓒ네이버

네이버 카페 이웃 페이지ⓒ네이버

당근마켓은 구(區) 단위의 지역을 세분화해 반경 4~6km 이내 이웃끼리 중고 직거래를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올해 8월 기준 당근마켓의 총 가입자 수는 2,100만명. 대한민국 가구당 1명은 당근을 쓴다. 대형 플랫폼도 하이퍼로컬 시장의 가치를 알아봤다. 네이버는 지난해 사용자 위치 기반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인 ‘이웃 서비스’를 오픈했다. 요즘 동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게시글, 근처에서 바로 거래할 수 있는 중고 거래 게시물, 맘카페나 아파트 주민 카페와 같은 지역의 다양한 네이버 카페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서비스다.

우리나라만의 얘기가 아니다. 하이퍼로컬은 글로벌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판 당근마켓으로 불리는 ‘넥스트도어(Nextdoor)’는 코로나를 기점으로 급성장했다.

해외 하이퍼로컬 플랫폼 넥스트도어(Nextdoor)

해외 하이퍼로컬 플랫폼 ‘넥스트도어(Nextdoor)’

올해 6월 말 기준 넥스트도어의 이용자 수는 전년 대비 17% 늘어난 6,300만 명을 기록했다. 이밖에 중국판 당근마켓 ‘아이후이서우(爱回收)’, 이웃끼리 남은 식료품을 무료 나눔하는 영국의 ‘올리오(Olio)’ 등 세계 각국의 지역들은 더 작은 단위로 쪼개어져 긴밀한 관계 맺기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물건보단 사람에, 거래보단 연결에

사실 로컬 플랫폼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따지고 보면 동네 장터와 벼룩시장 등이 그 원형인 셈. 그런데 요새 좀 ‘뜬다’ 하는 하이퍼로컬 플랫폼들 사이에선 기존의 시장들과 다른 점이 있다. 단순 거래 시장에서 탈피해 완전히 새로운 의미의 지역 커뮤니티를 생성한다는 것. 당근마켓의 ‘동네생활’과 네이버 이웃 서비스의 ‘이웃 소식’ 탭을 예로 들어보자. 두 온라인 소통 공간에서 동네 주민들은 일상을 나누고 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주고받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 ‘강남역 OO건물 지금 철거 중이라 교통이 혼잡하네요.’ ‘오늘 저녁에 동네에서 치맥하실 분?’ ‘공원에서 반려견을 잃어버렸는데 제보 부탁드려요(실제로 찾는 경우도 많다).’ 플랫폼 내 온라인 소통 공간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가 된 지 오래다. 그 안에서 익명의 ‘주민’들은 ‘이웃’이 되어 전동 드릴을 빌려 주거나, 직장 상사 욕을 같이 해주거나, 따뜻한 밥 한 끼를 함께 한다. 그동안 거리 제약을 없앤 비대면 기반의 서비스(카카오톡, 쿠팡 등)들이 오프라인의 일상을 온라인으로 옮겼다면, 하이퍼로컬 플랫폼은 온라인의 일상을 오프라인으로 옮긴다. 중고 거래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중 큰 축일 뿐, ‘거래’보단 사람과 사람 간 ‘연결’에 무게가 실린다.

기자가 실제 당근마켓을 통해 판매한 상품들

기자가 실제 당근마켓을 통해 판매한 상품들

하이퍼로컬 플랫폼들은 사람과 사람뿐 아니라 동네 상권과 주민 사이도 중개한다. 당근마켓의 ‘내 근처’ 서비스는 지역 가게들의 정보를 모아볼 수 있는, 일종의 지역 정보지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가게 사장님들은 솔깃한 할인 이벤트를 제공하는 등 주민들에게 적극 어필하고, 주민들은 ‘찐 후기’로 응답한다. 우리 동네의 새로운 가게 소식, 알바 구인 글 등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네이버는 특히 지역 상권 연계에 강점을 보인다.

네이버 ‘동네시장 장보기’ⓒ네이버

네이버 ‘동네시장 장보기’ⓒ네이버

네이버의 ‘동네 시장 장보기’는 동네 전통 시장에서 파는 신선 식재료나 반찬 등을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당일 배달해주는 서비스다. 전국 90여 곳 시장에서 운영 중이고, 실사용 후기도 칭찬 일색이다. 물리적으로 가깝단 이유로 오프라인에만 머물렀던 지역 상권을 온라인화해 인근 가게와 주민 사이의 장벽을 허문 것. 이웃과 이웃, 주민과 상점을 연결하는 하이퍼로컬 플랫폼이 진정한 ‘중개자’로 거듭나고 있다는 뜻이다.

하이퍼로컬, 왜 뜬 거죠?
코로나19가 안겨 준 일상의 변화

코로나19가 안겨 준 일상의 변화

하이퍼로컬 플랫폼의 부흥, 대체 이유가 뭘까. 코로나가 많은 것을 바꿨다지만, 그 변화는 정작 작은 데에서 느껴진다. 예컨대 신발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우선 운동화 밑창 닳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재택근무가 늘었고, 장거리 외출이 줄어든 탓이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활동 반경과 소비 지역도 좁혀졌다. 친구들과의 만남부터 쇼핑과 카페 투어까지. 가까운 거리에서 모든 걸 해결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론 거리두기가 시행됐지만, 역설적으로 동네 안 직거래는 늘었다. 이런 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는 하이퍼로컬 플랫폼의 등장과 맞물려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었다.

당근마켓 페이스북 페이지 ⓒ당근마켓

당근마켓 페이스북 페이지 ⓒ당근마켓

하이퍼로컬 서비스의 성장엔 편의성도 한 몫 한다. 당근마켓만 해도 그렇다. 우선 가입 과정과 이용 방법이 정말 쉽다. 당근마켓이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이용하는 거의 유일한 앱’이란 수식어를 달고 있는 이유이기도. 덕분에 중고 거래에 흥미가 없던 이들까지도 이용자로 대거 유입됐다. 네이버 이웃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네이버 아이디만 있다면 누구나 쉽게 게시글을 남기고 소통할 수 있다. 필요한 건 오직 이웃과 관계 맺을 만큼의 용기뿐!

물론 국내의 토양이 하이퍼로컬이 싹트기 딱 좋은 조건을 갖춘 탓도 있다. 스마트폰을 매개로 위치 기반 IT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 있고, 물류망과 배달망(우리가 어떤 민족인가?)이 널리 잘 깔려 있지 않은가. 도시나 지역의 인구밀도도 상당한 데다, 각 동네 골목골목마다 식당과 상점 등 자영업도 무성하다. 물론 좀 더 심리적으로 접근해 보자면, 이런 이유도 있다. 비대면이 일상화되니, 사람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뭘 하며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들도 나와 같은지…. 단절된 세상일수록 연결에 대한 갈증은 심화되는 법. 이러한 갈증도 하이퍼로컬의 부흥에 불을 지핀 주역 중 하나일 테다. 아무튼 그렇게 동네와 이웃은 일상의 중심이 됐고, 지역은 하나의 거대한 놀이터가 됐다. 사람들은 이제 동네에서 물건을 사고, 정보를 얻고, 사람을 만난다. 플랫폼들이 장을 마련해 주면 그 안에서 신나게 노는 건 주민들의 몫이다.

하이퍼로컬 플랫폼이 흥행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편리함 때문이겠지만, 사람은 근본적으로 끊임없는 연결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 아닌가. 세상 속에 놓여졌을 때 비로소 ‘나’는 좀 더 뚜렷해진다. 이러한 커뮤니티에 대한 갈증은 생활 기반으로 이뤄졌을 때 가장 자연스럽고, 또 편하다. 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전 방위적 플랫폼 시대에 생활지역 기반 플랫폼이 각광받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고 거래를 넘어 동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하는 지역 커뮤니티가 되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입니다.” 당근마켓 김용현 공동대표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목표다. 앞으로 지역은 더욱 더 ‘하이퍼’하게 쪼개질지 모른다.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말하자면 제2의 당근마켓)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거나 쇠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궁한 미디어의 변화 속에서 분명한 건, 우린 늘 ‘연결’을 꿈꾸며 살아갈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연결은 우리의 지역, 바로 당신 근처에 있다는 것이다.

곽서희
여행매거진 <트래비> 기자
기자와 에디터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다, 결국은 여행가란 도착지에 내린 여행기자.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지역의 이야기를 찾아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를 그리는 중이다. 동그라미가 빼곡할 날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