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진흥원 공식 웹진 《지문》이 발행된다. ‘지문’이라는 제호는 지역문화의 약칭 지문(地文)을 뜻하는 동시에 손의 지문(指紋)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지문(地文/指紋)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지역의 무늬’를 의미하는 지문(地紋)이라는 뜻을 담고자 했다. 그렇다. 웹진 《지문》은 지역의 무늬를 담아내는 그릇을 지향하고자 한다.
재난의 시대와 지역의 터무늬하지만 코로나19 시대 지역의 무늬는 지금 어떠한가. 재난의 시대에 내가 사는 지역의 무늬가 갈수록 희박해져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국가에 의해, 자본의 위력 앞에서 갈수록 ‘터무니없어지는’ 지역의 현실에서 코로나19라는 재난 상황은 지역의 ‘회복력’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예를 들어 지난해 아주대 사회학과 노명우 교수팀이 연구한 <니은서점 골목의 코로나, 2020년의 기록>(은평문화재단, 2021.3)은 재난의 시대 지역의 회복력이라는 차원에서 중요한 화두를 제공한다. 이 연구는 서울 은평구에서 ‘니은서점’을 운영하는 노명우 교수팀이 서점이 있는 ‘서울 은평구 연서로26길’ 300미터 남짓한 거리에 살고 있는 자영업자들이 재난의 시대를 맞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전수조사하고, 그 중 여섯 명을 인터뷰한 것이었다. 결론은 ‘사회적자본’(social capital)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웃’의 형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노 교수팀이 결론에 쓴 “연서로26길에는 골목길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이 없다”라는 문장에 오래 눈길이 머문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공유지가 없는 골목에서 지역의 터무늬는 제대로 스며 나오지 않는다. 연서로26길이 그저 ‘통행로’일 뿐이었다는 노 교수팀의 진단은 그래서 아프다. 어디, 연서로26길뿐일까. 내가 사는 생활권에 관심을 갖고, 재난의 시대 지역 사회의 심리를 탐구하려는 활동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고 지지하는 ‘서로걱정모임’ 같은 지역 주민들의 소소한 관계망이 필요하다. 지난 8월초 춘천문화재단이 주최한 <‘도시가 살롱’ 여름밤 포럼>(8.2, 축제극장몸짓)에서 확인한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지난해부터 추진된 <도시가 살롱> 사업은 공간 주인장이 기획한 커뮤니티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출발해 춘천의 대표적인 ‘도시 브랜드’가 되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사적 상업공간이 시민 ‘누구나’ 함께하는 공유공간이 되었을 때, 나를 바꾸고 지역을 바꾸며 새로운 지문(指紋/地紋)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결론은 ‘공간의 힘’이었다.
지역은 장소의 에로스가 살아 있는가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작동하고 있다. 공유지가 사익(私益)을 추구하려는 일부 사람 및 세력에 의해 갈수록 사유화되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런 현실의 중력장이 여전히 작동하는 한, 내가 사는 지역의 ‘터무늬’는 어느 순간 ‘터무니없어지며’ 사회적자본 또한 형성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 ‘장소의 에로스’(게리 스나이더)가 사라진다. 우리는 재난의 시대 어느 정치철학자가 “외로움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김만권)라고 한 말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마땅하다.
그러면 장소의 에로스가 살아 있는 지역의 무늬는 어떻게 발현되는가. 그래서 중요한 게 지역 주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유공간이다. 공간이 없으면 영혼이 잘 담기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영국 학술모임 더케어콜렉티브도 최근 출간한 『돌봄선언』(2020)에서 ‘상호의존의 정치학’을 위해서는 ‘돌보는 공동체’가 특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들은 돌보는 공동체는 상호지원, 공공 공간, 공유자원, 지역 민주주의라는 네 가지 핵심 특성에 의해 구축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시장에 아웃소싱하며 의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에서 ‘인소싱’하며 보편적 돌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의 <도시가 살롱> 포럼에 참석한 이범준 주인장(‘시골하루’)이 한 말에서도 확인된다. 농업, 농촌, 농민이 좋아 춘천으로 귀농귀촌한 청년 세대인 이범준 주인장은 춘천살이의 가능성을 실험하며 느낀 단상을 털어놓는다. “농촌에 필요한 것은 큰 금액을 들여 짓는 도농교류센터가 아니라, 농촌의 삶을 느낄 수 있고, 사람과 교감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필요하다.” 즉 서로가 화학적으로 비빌 수 있는 ‘비빌 언덕’이라는 공공 공간의 중요성을 환기한 것이다.
지역 토양 바꾸는 ‘지렁이 되기’의 실천지역의 무늬는 또한 공유 공간이 있다고 저절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으며 화학적으로 ‘비빌 수 있는’ 매개자들이 필요하다. 지역의 토양(soil)은 견고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역의 견고한 토양을 바꾸려는 ‘지렁이 되기’의 꾸준한 실천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수년 전부터 지역에서 지렁이 되기를 꾸준히 실천하는 활동가들을 일러 ‘동네지식인’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런 동네지식인들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1인 다양성’을 실천하며 목적을 가진 교류의 장을 만들고자 한다. 한 마디로 말해 지역의 변화는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보다는 “그곳에 어떤 사람이 있는가?”에 의해 가능해진다. 내가 사는 지역에 오지라퍼의 대명사 격인 ‘홍반장’이 아니라 지렁이 되기를 꾸준히 실천하는 ‘동네지식인’들이 더 많이 필요해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커뮤니티매핑 전문가인 임완수가 “점이 되는 사람이 모여 선을 만들어 관계를 맺고, 이 선이 모여 면이 만들어지면 네트워킹이 된다”라고 말한 것도 결국 사람과 사람을 잇는 동네지식인 같은 존재의 중요성을 환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지역의 터무늬는 당위로서의 활동으로만 형성되지 않는다. 그런 당위적인 활동에서는 정책의 소나기 효과가 있을 따름이다. 재정과 인력이 투입되는 정책사업 기간 동안에는 지역이 활성화되는 것 같지만, 재정과 인력이 빠져나가는 순간 하루아침에 예전보다 더 안 좋은 상태로 돌아간 현장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내 삶의 근간으로서 삶에 근거한 문화예술(교육) 활동이 더 중요해졌다. 맨 땅에 헤딩하듯 지렁이 되기의 실천으로 ‘사심(私心)’ 가득하게 지역에서 기획하고 활동하는 동네지식인들을 키워야 한다.
이에 따라 지역의 터무늬를 만들어가는 인력(人力)에 대한 패러다임 또한 과감히 전환해야 한다. 특히, 자원봉사 프레임이 강한 ‘홍반장’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역에서 하는 자원봉사 활동도 이제는 고민이 필요해졌다. 동네지식인은 홍반장의 활동과 언뜻 유사해 보이지만, 자기가 사는 지역에 ‘평상’과 ‘우물’을 놓으려는 커넥터(connector) 같은 존재이다. ‘평상’을 놓는다는 것은 ‘드루와’의 환대를 일상적으로 실천한다는 의미이고, ‘우물’을 지킨다는 것은 지역의 공유지를 지키며 공유공간을 가꾼다는 의미이다.
웹진 《지문》은 지역을 지역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동네지식인들의 다양하고 재미있는 활동들을 주목하고자 한다. 특정한 예술 장르 기반의 ‘문화공동체’보다는 공동체 삶의 문화를 더 자세하고 섬세하게 집중 조명하고자 한다. ‘우리 지역이 최고야’ 식의 과도한 지역주의를 경계하고, 우리 지역을 새롭게 비판적으로 바라보려는 비판적 지역주의의 관점과 태도 또한 필요하다. 자신이 사는 지역의 터무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는 한, 지역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만드는 방식이 우리를 결정한다쉽지 않은 일이다. 시장과 국가가 주도하는 ‘체계’의 힘은 언제나 항상 로컬(local)을 기반으로 한 ‘관계’의 힘보다 압도적으로 크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비관적인 것도 아니다. 언젠가 충북 옥천에서 발행되는 커뮤니티 저널리즘인 <옥천신문> 황민호 제작실장과의 대담(2019.6.30.)에서 “체계의 제도를 어떻게 생활세계로 끌어내리고, 생활세계 안에서 제도를 움직이게 할 것인가가 큰 관건이 된다”고 한 말과 옥천의 실천은 좋은 참조점이 된다. 결국, 지역에서 공동체문화를 만드는 활동은 “만드는 방식이 우리를 결정한다”(프리모 레비)는 활동의 원칙을 바탕으로 사람들과 함께하려는 데에서 비롯할 것이다.
어린 시절 탐독했던 A. 뒤마의 『삼총사』에 나오는 슬로건이 생각난다. ‘하나는 셋을 위하여, 셋은 하나를 위하여.’ 커뮤니티에 전부 몰빵해도 안되고, ‘혼자의 넓이’에만 지나치게 몰입해도 안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좋을 것 같다. 어느 철학자가 언명한 ‘비사교적 사교성’(칸트)이라는 명제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저마다의 ‘필요’에서 출발했지만, 지역에서의 ‘역할’을 찾아가며, 친밀공동체(공동체문화)의 성격으로 전환하려는 문화적 계기를 찾고자 하는 지역의 재미있고 의미 있는 문화기획이 꾸준히 이어졌으면 한다. 공동체문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역은 당신의 캔버스가 결코 아니다. 지역 활성화를 ‘위하여’ 하지 말고, 나 자신의 자발적 에너지의 흐름에 ‘의하여’ 문화예술(교육) 활동을 하자. 유머 감각은 필수! 웹진 《지문》은 당신 곁에서 지역의 재미있는 변화를 잘 읽어주고 해석하는 정직한 목격자가 되도록 하겠다.